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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춘천 대첩에 나선 학도병들,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2024-06-25     엠에스투데이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소양1교’. (사진=MS TODAY DB)

 

 ‘춘천 대첩’에 춘천지역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힘을 보탰다. 6·25가 터지자 춘천 일원에서 펼쳐진 전투는 개전 초기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과 싸워 거둔 첫 승리이자, 유일한 승전보로 우리 군의 사기와 명예를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부전선에서는 북한군에 밀려 3일 만에 서울을 철수해야 했지만, 동부전선에서는 6사단이 남하하는 북한군을 춘천과 가평 등 곳곳에서 저지, 서울을 동서로 공략하려던 적의 계획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 ‘춘천 대첩’은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투와 함께 6·25 3대 전투로 불린다. 

 춘천중, 춘천농업학교, 춘천사범학교 등 3개교 학생 수백 명은 일요일 새벽 포탄이 떨어지자 모이라는 지시에 따라 학교로 가 군의 지원요청에 응했다. 이들은 25일부터 30일까지 군부대의 인솔에 따라 ‘군번 없는 군인’으로 활동했다고 증언한다. 탄약과 보급품을 나르고 파괴된 참호를 정비한 것은 물론 아낙네들이 만든 주먹밥을 군인들에게 전달하고 부상병을 돌보았다. 그들의 호국 의지에 머리가 숙어진다. 군과 학도병들의 항전으로 춘천, 홍천을 거쳐 충주를 점령한 뒤 서울을 협공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고 국군은 후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군 지원에 나선 것은 6.25 당일 아침이니 서울지역 학생들이 수원으로 피난 가 6월 29일 결성한 비상학도대보다 4일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유재식 6·25 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은 “춘천은 학도병의 발상지”라고 말한다.  6·25가 발발한 지 어느덧 74년이 지났다. 까까머리 학생들이던 학도병들도 이제 아흔이 넘었다. 나라를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애국심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평화와 번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학도병들의 나라 사랑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예우하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보훈이 없으면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도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못지않게 그들의 활동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

생존 학도병들을 인터뷰, 책으로 남기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학도병들은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어린 학생들은 책을 읽으면서 전쟁의 잔혹함과 공포를 공유, 안보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다. 한편으론 학도병들의 존재는 6.25 당시 우리 국방력이 취약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병력이 충분했다면 학생들이 무기를 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2의 학도병이 생기지 않도록 굳건한 방위태세,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을 갖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