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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 특집) 강원도 젊은이들로 창설된 8연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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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의 날 특집) 강원도 젊은이들로 창설된 8연대의 비극

    1946년 4월1일 춘천에서 탄생한 8연대
    표무원의 월북 사건 후 원주로 후방배치
    교체된 충청도 7연대는 춘천대첩 이끌어
    월북후 인민군으로 참전한 '비극 스토리'

    • 입력 2024.09.30 00:09
    • 수정 2024.10.04 00:19
    • 기자명 김동섭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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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5월5일 새벽 춘천에 있던 8연대 1대대(대대장 표무원)와 홍천에 있던 2대대(대대장 강태무)가 집단 월북했다. 두 대대장이 “야간 훈련을 한다”며 부하들을 속이고 38선을 넘어갔다. 집단 월북사태를 맞은 춘천 시내는 이날 비상이 걸려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밤 8시부터 내려졌다. 8연대의 예비대인 3대대는 동료 부대원들을 구출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시도는 무산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38선을 넘어 공격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사건 이튿날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혔다.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1949년 5월 월북 환영대회에서의 강태무(左)와 표무원(右)
    1949년 5월 월북 환영대회에서의 강태무(左)와 표무원(右)

    2개 대대가 실종된 8연대는 급하게 원주로 옮겨 재편성에 들어갔다. 충청북도 청주에 있던 7연대(연대장 임부택)가 전격적으로 춘천으로 이동, 8연대의 빈 자리에 투입됐다. 8연대 대신 춘천에 주둔하게 된 7연대는 북의 남침에 맞설 대비태세를 잘 갖춰 6·25전쟁때 춘천 대첩의 수훈갑이 되었다. 

    8연대는 1946년 4월1일 전국에서 8번째로 춘천에서 창설된 부대다. 강원도 영동과 영서 지역의 젊은이들을 모아 춘천과 원주, 강릉에 3개 대대를 편성했다. 1946년 울진의 미곡 폭동 사건을 수습하고, 오대산 공비, 38선 접경지대를 습격하던 인민군들을 격퇴시키며 승전보를 올리던 부대였다.

    그러나 이처럼 강원도 젊은이들로 창설된 8연대의 비극은 1949년 5월4일 춘천에 주둔중이던 8연대 1대대장 표무원이 4개 중대 504명을 데리고 속여 월북하면서 시작됐다. 부대원들에게 실탄도 갖지 않고 야간 훈련에 나서게 했다. 38선을 넘어 화천의 말고개로 간 뒤 인민군에 포위되었다. "투항하자'는 대대장 말에 부대원들은 혼비백산했다. 행렬의 선두로 가던 1중대는 꼼짝없이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이처럼 실탄없이 훈련에 나서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표무원의 계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4중대의 대부분은 인민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귀환했다.

    홍천에 주둔하던 2대대장 강태무도 같은 방식으로 5월5일 새벽 1시에 부대원 276명을 이끌고 인제 현리쪽으로 38선을 넘었다. 강태무의 3발 총소리를 신호탄으로 그와 내통한 인민군은 산꼭대기 고지에서 국군을 향해 사격을 했다. 부대원들은 강태무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저항에 나섰고,  일부는 38선을 넘어 되돌아왔다.

    이처럼 인민군과 사전에 내통해 월북한 표무원과 강태무 대대장은 둘다 국방경비사관학교 출신의 좌익이었다. 둘은 월북한 공로로 인민군에 편입돼 대령으로 빠르게 진급했고, 나중에 인민군 장성까지 됐다. 이들은 당초 군부대내에 침투한 공산주의 동조자로 낙인찍혀 숙군 대상에 올랐다. 그러자 월북을 도모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당초 4월에 북으로 넘어가기로 했다가 시기를 늦췄다는 인민군 장교출신의 증언도 있다.  "원래 4월27일 표와 강이 행동(귀순)하는 것으로 밀정을 통해 극비리에 연락받았는데, 5월에 월북했다. " 인제 방면에서 근무했다는 인민군 38경비여단 장교출신의 1992년 증언이다.

    그러나 8연대 강원도 출신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길이 없다. 월북 군인 숫자도 자료마다 달라 정확하지 않고, 자진 월북한 것인지, 끌려간 것인지도 전혀 구분되지 않고 모두가 행방불명으로 처리됐다.

     

    평양역에 도착한 월북 장병들과 환영하는 시민들
    평양역에 도착한 월북 장병들과 환영하는 시민들

    다만 인민군 포로 신문서에 이들의 행로가 나타난다. 8연대 출신으로 북으로 넘어간 뒤 인민군이 됐다가 유엔군에 포로로 잡힌 이들의 기록이다. 이들의 진술을 보면, 월북한 8연대 장병은 300명으로 인민군에 편입됐다고 한다. 특히 홍천에서 넘어간 2연대 출신은 100명가량이었고, 50~100명은 인민군과 교전하다가 사망했다고 진술했다. 

    표무원의 1대대가 월북하자,  화천초등학교에서 환영 행사가 열렸다. 지금도 화천에선 이 환영대회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원산을 거쳐 5월8일 평양에서 30만명이 모인 가운데 환영 대회를 가졌다. 그러나 대대장에게 속아 북으로 넘어간 8연대 병사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인제에서 원산행 트럭에 타라고 하자, 8연대 병사들은 집단으로 승차를 거부했다고 한다. 평양 환영대회에서도 몰래 욕하며 꽃다발을 팽개친 이들도 있었다는 증언도 나온다. 자의로 한 월북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애초 춘천에서 8연대 병사를 모집했을 때도 좌익 성향의 젊은이들은 배제했다는 것이 8연대 창설멤버였던 황헌친(예비역 준장) 당시 소위의 증언이다. 

    강·표 소령과 대대원 월북에 대한 평양시민환영대회
    강·표 소령과 대대원 월북에 대한 평양시민환영대회

    8연대 출신으로 북으로 넘어가 인민군으로 625때 포로로 잡혔던 남모씨의 증언을 보자. 1948년 12월 춘천에서 8연대 1대대에 입대한 그는 대대장 표무원의 명령따라 월북한 1대대 장병들은 240명이라고 진술했다. 월북직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한달간 군사훈련과 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7월 평남 진남포에서 인민군 19보병연대로 편성됐고, 이어 함북 회령에서 417 독립대대로 바뀌었다. 1950년 5월 전쟁 직전에 만포로 옮겨 국경수비대 임무를 맡았다. 북한은 이처럼 월북자끼리만 모아 부대를 편성했고, 전쟁 발발 직전에는 춘천 태생의 부대를 아주 멀리 중국 국경지대로 보냈다. 그리고 전쟁이 터진 후인 7월6일 김화를 거쳐 춘천에 도착했다. 이후 경북 영덕 전투에서 아군의 삐라(전단)를 들고 귀순했다.

    원주가 고향으로 2대대에 입대했던 김모씨는 월북 도중 인민군들과 교전을 벌였던 인제에서 부상을 입고, 귀환하지 못한채 북으로 끌려갔다. 북에 끌려간 2대대 부대원들은 모두 7월11일 인민군에 편입, 함경북도 회령에서 1대대 부대원들과 함께 독립대대로 편성됐고, 국경 수비대로 옮겨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7월에 기차로 강원도 김화로 이동해 춘천, 홍천을 거쳐 경북 문경까지 내려갔다가 포로로 잡혔다. 남씨와 김씨처럼 월북 후 1년 만인 1950년 7월에 인민군이 되어 고향인 춘천과 홍천 땅을 밟았던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춘천에서 탄생해 강원도 젊은이들의 부대였던 8연대다. 그러나 대대장에게 속아 북으로 끌려갔던 이들은 인민군으로 변신해 6·25때 다시 아군과 전투를 벌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월북 사건 이후 8연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 춘천에서 원주로 내려가 재편성했다. 1950년 10월에는 평양에 입성한 부대로 용맹을 떨치고, 현재는 화천의 7사단 8여단으로 휴전선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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