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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구한 5일간의 방어 ‘춘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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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을 구한 5일간의 방어 ‘춘천전투’

    [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춘천이야기]

    • 입력 2024.06.06 00:00
    • 수정 2024.06.07 00:33
    • 기자명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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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구 전 춘천학연구소장
    허준구 전 춘천학연구소장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란의 위기 상황 속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호국영령과 순국선열, 국가유공자 등이 실천한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며 그 의미를 다짐하고자 만든 달이다.

    6월에는 의병의날, 현충일, 봉오동전투 승전일, 6·10민주항쟁기념일, 6·25전쟁일(한국전쟁), 6·29민주화선언일 등의 기념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호국보훈의 달로 선정되기에 충분하다.

    이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춘천에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북한 김일성은 남한을 무력으로 집어삼킬 야욕으로 1950년 4월 10일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비밀리에 받아내고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남침을 감행했다.

    북한군은 중부 전선의 핵심 거점인 춘천지역을 6월 25일 하루에 돌파해 경기도 이천을 지나 수원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남쪽에서 포위하여 국군의 주력부대를 고립하여 섬멸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북한의 전략은 하루가 아니라 닷새가 지난 6월 29일에야 겨우 달성하였다. 그것도 전투에서 승리로 이루어 낸 성과가 아니라 아군이 고립을 피하고자 작전상 후퇴에서 얻은 결과였기에 북한군에게는 치욕이었다.

    이 당시 국군 6사단은 춘천에 7연대, 홍천에 2연대, 원주에 19연대가 예비대로 배치됐으며, 전쟁 발발 2주 전 한국전쟁 영웅 김종오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전쟁 발발 며칠 전 귀순한 북한군으로부터 남침을 위해 화천과 양구지역에 북한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김종오 사단장은 전군이 비상경계 태세를 해제한 6월 24일에도 전 장병 외출 외박을 전격적으로 통제하고 각 주둔지의 경계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교육과 전투 훈련을 강화했다. 나아가 포병 진지를 강화하고 정보활동에 주력해 38선 부근 적의 보병부대와 수십 대의 차량, 자주포 등이 집결한 것을 직접 확인했다.

     

    1950년대 초 한국전쟁 중 춘천시와 봉의산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이렇게 적의 침공에 철저하게 대비했던 6사단은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 우두산을 근거지로 옥산포 전투에서 승리해 사기가 드높았고, 26일에도 옥산포에서 북한군 대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이어갔다. 27일이 되어서야 북한군은 소양강을 건너거나 소양교(현 소양1교)를 공격하여 오전 11시쯤 지휘부가 있던 봉의산 정상부를 빼앗고 시내까지 점령해 들어왔다.

    국군 6사단의 후퇴는 27일에 서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육군본부가 시흥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러 자체 고립에 처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부득이 27일 오전 춘천 시내에서 철수해 원창고개와 금병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29일 오전까지 원창고개를 사수하다 홍천으로 철수했고, 30일 횡성과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후퇴했다.

    춘천전투는 3일간의 방어가 아닌 6월 25일부터 29일에 이르는 5일간의 방어였다. 5일에 걸쳐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구축으로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 시간을 벌어주었고, 한국전쟁 승리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기회가 됐으며 북한 공산당의 적화통일 야욕을 꺾는 결정적 역할로 이어졌다.

    춘천전투는 한국전쟁 최초의 승리이자 대한민국을 구해낸 한국전쟁 3대 전투 중 하나였다. 춘천전투 승리의 뒤에는 민·관·경·학생의 나라 사랑과 지역을 지키고자 했던 애향심이 진지 구축과 포탄의 이송 등의 실천적 결과로 이어져 형성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1955년 우두산 충렬탑제막식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지고 두 해 뒤인 1955년 7월 26일에 춘천 우두산에 한국전쟁 당시 순국한 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충렬탑이 세워졌다. 충렬탑은 건평 68㎡ 부지에 기단 높이 12m, 탑 높이 12.8m 규모의 3면으로 제작됐다. 1956년 현충일이 제정되고 강원도와 춘천시는 이곳에서 현충일 추모행사를 줄곧 이어오고 있다.

    춘천전투는 대한민국의 존립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520만 명이라는 인명 손실이 뒤따랐고 조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기반은 남김없이 파괴됐다. 우두산의 충렬탑은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선열의 피눈물 어린 충고를⋯. 

    ■ 허준구 필진 소개
    -전 춘천학연구소장
    -강원도 지명위원회 위원
    -춘천시 교육도시위원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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