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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복궁 훼손과 춘천이궁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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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경복궁 훼손과 춘천이궁 해체

    [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춘천이야기]

    • 입력 2024.08.15 00:00
    • 수정 2024.08.15 23:07
    • 기자명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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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

    올해는 대한민국이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이룬 지 어언 79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삼키고 중국의 대륙을 침략하더니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있던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일제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한반도는 일제가 강제 점령한 이래로 일제의 상품과 자본을 들여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하게 세우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그러한 가운데 조선의 자존심을 궁궐의 파괴로 형해화 해나갔다.

    일제의 조선 문화재 훼손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고 힘의 우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 대표적 훼손이 국보 1호였던 숭례문(崇禮門)의 담장 파괴였다. 일제는 1907년 서울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숭례문에서 이어져 나간 성곽을 헐어내고 도로를 내었으며, 1915년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을 없애버렸고 연이어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파괴를 감행했다.

    일제는 1915년 경복궁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경복궁 내 4000여 칸을 무단으로 해체 반출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일본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경복궁 내 있었던 자선당은 전체를 해체, 일본으로 무단으로 반출하기도 했다.

    또 경복궁의 동대문인 흥례문(興禮門)을 헐어내고 1925년에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 있던 광화문을 총독부 건물을 가린다는 이유로 해체하여 건춘문(建春門) 곁으로 이전을 강행했다.

    일제는 조선의 대표 유산 경복궁 훼손에만 머물지 않고 문화재 약탈과 파괴도 서슴지 않았다. 문화재 약탈의 그 대표적 사례가 1905년 함경북도 길주에 있던 북관대첩비를 강탈하여 도쿄 야스쿠니 신사 곁에 방치한 사건이다.

    1909년 일본 유학생 조소앙이 이 비를 발견하고 「대한흥학보」에 ‘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 일명 북관대첩비)’ 글을 기고하며 사실을 알렸지만, 이 일은 광복 후 33년이 지난 1978년에 와서야 재일 한국인 학자 최서면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기나긴 우여곡절을 거쳐 2005년 을사늑약 체결 100년이 되던 날인 11월 17일 경복궁으로 옮겨져 반환 공식 제막식이 이루어졌다. 2006년 3월 1일 개성을 거쳐 북으로 송환되어 3월 23일 원래 자리에 세워졌다. 무려 101년 만에 약탈당 문화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춘천에는 서울 경기를 벗어나 세워진 전국 유일의 궁이 있었다. 이 궁을 춘천이궁이라 불렀고, 춘천이궁은 임금이 유사시에 피란하여 머물 피란용 궁궐이었다. 춘천이궁의 모체는 1648년 당시 춘천부사로 있던 엄황이 지은 객사인 문소각(聞韶閣) 건물이다. 1869년 14칸에서 24칸 규모로 확대되고 바깥문과 안쪽 문인 조양루와 위봉문이 솟을삼문의 형태로 갖춰지며 궁으로써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1890년 춘천이궁이 완성되자 춘천은 부(府)에서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했고, 1896년 강원도 관찰사가 파견되는 관찰부로 격상돼 영서와 영동 26개 군을 관할하는 강원도의 수부 도시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 듯이 춘천이궁의 핵심 건물인 문소각에 일본군이 무단 점거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관광상품을 전시하며 궁궐의 품격을 고의로 떨어뜨렸다. 1938년에는 춘천이궁의 바깥문인 조양루를 우두산으로 이전하여, 일본의 신(神) 소시모리를 호위하는 문으로 삼기도 하였다. 1940년에는 문소각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되어 춘천이궁은 완전 해체라는 비극의 길로 들어섰다. 문소각의 안쪽 문인 위봉문은 예전 강원경찰청 자리 뒤편으로 옮겨져 세종호텔에 있었던 신사의 바깥문처럼 사용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일제가 조선의 상징이었던 궁궐의 훼손과 해체를 폭압적으로 강행한 이유는 자명하다. 민족정기 말살과 조선의 영구 점령을 위한 획책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획책에 맞서 목숨을 바쳐 대한독립을 쟁취한 독립유공자와 관계자 모든 분께 79주년 광복절을 맞으며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 허준구 필진 소개
    -전 춘천학연구소장
    -강원도 지명위원회 위원
    -춘천시 교육도시위원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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