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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 의주 사람들이 잘 굽는데, 명나라의 거위구이 맛과 아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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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위. 의주 사람들이 잘 굽는데, 명나라의 거위구이 맛과 아주 비슷하다.”

    [도문대작] 41. 맛있는 거위 요리에 어찌 국경이 있으랴

    • 입력 2024.08.31 00:01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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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세종 때 대제학을 지낸 윤회(尹淮, 1380~1436)가 젊었을 때의 일이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유숙하게 되었다. 뜰 아래 앉아있는데, 주막집 주인의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놀다가 마당에 떨어뜨렸는데 흰 거위가 그것을 삼켜버렸다. 주인이 진주를 찾지 못하게 되자 자기 집에 유숙하는 젊은이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를 관청에 고변하려 하였다. 윤회는 특별한 변명을 하지 않고 그저 거위도 자기 옆에 매어 놓으라고 말했다. 이튿날 거위의 똥 안에서 진주가 발견되자 주인은 사정을 알게 되었다. 미안해하면서 왜 거위가 삼켰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윤회는 만약 자신이 거위가 삼켰다는 말을 하면 급한 마음에 거위 배를 갈라보려고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애꿎은 거위만 죽을 것이었으므로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대답했다.

    널리 알려진 이 설화는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권2)에 나온다. 물론 이덕무는 이 설화에 의문을 제기했다. 윤회가 거위가 삼켰다는 이야기를 해도 주인 역시 거위를 아낄 것이기 때문에 기다렸을 것이고, 설화의 내용처럼 거위를 자기 옆에 매어 놓으라고 말을 했다고 해도 주인은 왜 그러냐고 이유를 따져 물었을 것이라고 했다. 윤회가 실제로 이런 일을 겪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설화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주막집에서 거위를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전통 요리에서 거위는 주류 식재료라고 할 수는 없다. 요즘 사람들에게 ‘거위’ 하면 떠오르는 요리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푸아그라를 꼽을 것이다. 거위를 살찌워서 도축한 다음 간을 따로 떼어서 요리하는 것이 푸아그라다. 유럽에서도 거위가 비싼 식재료이기 때문에 그 대용으로 오리의 간을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어떻든 거위는 유럽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급 식재료였으므로, 푸아그라를 위해 간을 떼어낸 나머지 부위의 고기도 다양하게 요리되었다. 그들이 크리스마스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먹는 것도 거위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거위는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요리되었다. 구이와 탕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동아시아 지역에서 거위는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요리되었다. 구이와 탕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동아시아 지역에서 거위는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요리되었다. 구이와 탕이다. 조류를 구워내는 것으로 지금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북경 오리다. 청나라 말기 서태후부터 현대의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북경 오리가 연회장에 올라서 알려진 사례는 여러 번 있다. 그렇지만 오리구이보다는 거위구이가 훨씬 고급스러운 요리다. 거위구이는 중국 전역에서 널리 사랑받았다. 조선 후기 ‘산림경제’(권2)에는 거위를 요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거위구이다. 녹아압(熝鵝鴨)이라고 하는 이 요리는 여러 가지 식재료와 향신료를 첨가하면서 거위를 구워내는 방식이었다. 또 하나는 탕이다. 자세한 조리법은 나와 있지 않지만, 거위를 손질해서 넣고 곰국처럼 중불에서 오래 끓여낸다. 자아(煮鵝)라고 하는 이 요리는 일종의 거위곰국이라 하겠다.

    근대 이전에 나오는 거위 요리 관련기록은 주로 북방 지역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특히 만주 지역을 주 무대로 삼았던 여진족 계열 사람들은 거위를 사냥해서 먹었던 전통 때문에 거위요리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탓인지 허균은 거위를 떠올리면서 평안북도 의주에서 먹었던 것이 좋았다고 기억한다. 그의 ‘도문대작’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거위. 의주 사람들이 잘 굽는데, 명나라의 거위구이 맛과 아주 비슷하다.”

    허균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도 있고,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러 의주까지 다녀온 경험도 있다. 특히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 중국 측은 조선의 사신들에게 매일 식사에 필요한 식재료 일체를 지급하였다. 거기에는 반드시 거위가 1마리 이상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의 사신들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매일 거위요리를 먹을 수가 있었다. 허균 역시 이런 환경 속에서 중국의 거위요리를 맛보았을 것이다.

     

    의주에서 허균이 주로 즐겼던 거위 요리는 구이였다. ‘도문대작’에서 쓴 ‘굽는다’는 뜻의 한문 원문 글자는 ‘포(炰)’인데, 이는 거위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다는 의미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의주에서 허균이 주로 즐겼던 거위 요리는 구이였다. ‘도문대작’에서 쓴 ‘굽는다’는 뜻의 한문 원문 글자는 ‘포(炰)’인데, 이는 거위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다는 의미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의주에서 허균이 주로 즐겼던 거위 요리는 구이였다. ‘도문대작’에서 쓴 ‘굽는다’는 뜻의 한문 원문 글자는 ‘포(炰)’인데, 이는 거위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다는 의미다. 중국 사람들은 거위를 구울 때 다양한 재료로 만든 소스와 기름을 계속 발라가면서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다. 이렇게 구워내면 거위의 겉껍질은 바삭하고 살코기는 육즙이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워진다.

    그렇지만 일반 민가에서는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드는 거위구이보다는 탕으로 끓여 먹는 거위탕이 인기가 있었다. 아갱(鵝羹)이라고 기록된 거위탕은 거위와 여러 채소 및 향신료를 넣고 끓인 국이었다. 중국에 다녀오면서 시문을 남긴 사람 중에서는 거위 요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예컨대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중국으로 가면서 조선의 음식이 다양하고 맛있지만, 거위탕의 맛을 아는 사람은 적다고 썼다(‘청음집·淸陰集’ 권11). 또 김진수(金進洙, 1797~1865)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거위탕을 불에 데우자 기이한 향이 난다고 했다(‘벽로별집·碧蘆別集’ 권4). 만주 지역을 지나면서 거위탕을 먹었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중원 지역보다는 만주 지역에서 거위요리를 자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위고기 볶음(초아육·炒鵝肉)을 먹었던 신태희(申泰羲) 역시 심양 지역을 지나던 중이었는데, 너무 기름져서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음식 문화는 지도 위에 선을 그어서 표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압록강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의 음식 문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는 비슷한 입맛과 식재료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거위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다. 허균이 의주에서 맛있는 거위구이 요리를 맛보면서 중국의 거위구이와 맛이 흡사하다고 기록한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반도 북부 지역과 남만주 일대의 음식 문화가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거위를 구이나 찜의 형태로 조리해서 먹는데 그것을 ‘게사니’ 요리라고 한다. 게사니는 거위를 일컫는 북한말이다. 여전히 한반도 북부 지역과 만주 지역은 거위요리를 공유하면서 음식문화를 전승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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