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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춘향이 ‘전계심’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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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춘향이 ‘전계심’을 아시나요?

    [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춘천이야기]

    • 입력 2024.09.12 00:00
    • 기자명 허준구 춘천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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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구 전 춘천학연구소장
    허준구 전 춘천학연구소장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가 유명해진 까닭은 기생의 신분으로 한 남자만을 사랑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그 사랑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춘향이의 이러한 행동에 신분 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대의 논리가 담겨있다는 시각과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춘향의 모습 등이 조선시대 봉건 논리를 되풀이했다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춘천에는 춘향이와 동시대를 살다가 지아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킨 전계심이란 인물이 있다. 전계심(全桂心)은 춘천 관기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기생에 입적되었다. 17세에 고을 관리 집안에 시집간 그는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겠다고 신랑에게 약속했다. 이후 혼례복만을 챙겨 서울 궁궐로 거처를 옮기면서 남편과 떨어져 살게 된 그는 신랑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다. 항시 허리춤에 칼을 차고 주머니에 비상(砒霜)을 넣어 다니며 만약 더럽혀질 경우 죽으리라 맹세했다.

    전계심의 몸에는 신랑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는데, 몸이 더럽혀지는 것을 피하고 기어이 운명적 선택을 감행한다. 보름밤을 택하여 독약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마셨는데,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온 사람에게 자신의 가체(加髢·얹은머리)를 팔아 관을 마련해달라며 뒷일을 부탁한다. 전계심은 서울 생활을 하며 신랑으로부터 세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 세 통의 편지를 전계심의 허리춤에 매어 영결식을 진행하니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구슬프기 한이 없었다. 

    서방이 관을 안고 고향에 돌아오자, 전계심의 영혼은 서방의 꿈에 피 묻은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서방은 서울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봉의산 기슭에 묻어주고 장사를 지냈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강원도 순찰사 이병정(李秉鼎)은 ‘전계심이 남원의 춘향과 쌍벽을 이룰만하다’라고 평가하며 정려를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춘천부사 한용화(韓用和)는 자신의 봉급을 덜어내고 관아의 운영비를 들여 1796년 5월 비석과 봉분 그리고 정려를 지금의 소양1교 근처 길가에 만들었다.

    비문을 지은 이는 춘천에 유배와 있던 박종정(朴宗正)이고 글씨는 유상륜(柳尙綸)이 썼으며 공사감독은 고을 아전 김처인(金處仁)이 맡았다. 전계심의 비석과 무덤은 본래 소양강 길가에 있었으나 도로를 확장하며 봉분은 없어지고, 방치되던 비석은 1997년 소양정을 오르는 길목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동유기」에서 ‘전계심의 비는 소양강 길가에 있으며, 그 일은 영월의 기생 경춘(瓊春)과 같은 부류’라고 평가하였다.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신소설 「귀의성」의 주인공 춘천댁의 모티브로 사용했고, 일제강점기 대표 언론인 청오 차상찬은 「해동염사」에서 춘향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전국적 인물로 부각하였다. 1940년에 발간된 「강원도지」와 1950년대 집필된 「수춘지」에도 수록되었으며, 소양강문화제 전신인 1966년 개나리문화제에 시가 등불 행진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1974년 소설가 정비석은 「명기열전」을 연재하며 전계심을 주요 인물로 소개하였다.

    1997년 전계심 묘비 이전 당시로 추정되는 원고. (사진=춘천문화원)
    1997년 전계심 묘비 이전 당시로 추정되는 원고. (사진=춘천문화원)

    2010년에는 창작 소리극(국악 뮤지컬) ‘절기 전계심’이란 제목으로 부활하였고, 2023년에는 1인 뮤지컬 ‘전계심 브루쓰’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전계심을 소개한 글이나 작품에는 전계심의 절의와 절개를 칭송함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전계심의 비극에는 당시 시대상과 봉건 군주의 무능이 함축되어 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는 조공의 명목으로 조선 여성의 십분의 일인 오십만 명 이상을 강제로 끌고 갔다. 조국의 무능으로 끌려가 절통함과 비통함이 설움의 무게에 짓이겨진 이들은 고향에 돌아와서는 ‘환향녀’라며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사회 어느 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죽음으로 내몰리기 다반사였다. 수절을 강요하는 사회적 현상은 국가(남성)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좋은 포장재였다. 이러한 사회적·시대적 배경 아래 신분적 질곡의 굴레 속에 처절한 죽음으로 내몰렸던 전계심의 본모습이 감춰져 있다.

    ■ 허준구 필진 소개
    -전 춘천학연구소장
    -강원도 지명위원회 위원
    -춘천시 교육도시위원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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